저는 약물감시(PV) 전문가가 아닙니다. 제약사나 규제기관에 RMP(위해성 관리계획) 문서를 제출하는 업무는 PV팀의 고유 영역이죠. 하지만 최근 들어 저는 분석가로서 RMP 문서를 열어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예전에는 PV팀에서 "분석해 주세요" 하고 던져주는 요구사항만 받았다면, 이제는 그 요구사항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설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RMP라는 문서를, 데이터를 다루는 역학자의 시선에서 읽으면 흥미롭게도 '분석 설계도'로 번역됩니다. 오늘은 제 업무 관점에서 RMP의 세 가지 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공유해보려 합니다.
1. Safety Specification = Y 변수 정의서이자 연구 질문의 힌트
'안전성 중점 검토항목'에는 규명된 위해성이나 잠재적 위해성, 그리고 정보 부족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PV 관점에서는 관리해야 할 목록이겠지만, 저 같은 분석가에게는 "연구에서 무엇을 결과변수 Y로 잡아야 할지" 알려주는 정의서에 가깝습니다.
- 규명된 위해성(Identified Risk): 이 약은 간 독성이 확실하겠구나. 그럼 간 기능 검사 수치가 일정 기준 이상 튄 케이스를 Y로 정의해야겠구나.
- 잠재적 위해성(Potential Risk): 심근경색 가능성이 있다고? 그럼 이 약을 먹은 사람과 안 먹은 사람의 심근경색 발생률을 비교하는 가설 검정이 필요하겠구나.
그리고 안전성 중점 검토항목은 Y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종종 누구를 특수집단이나 고위험군으로 볼지, 무엇과 비교할지, 어떤 시간축으로 볼지에 대한 힌트도 함께 제공합니다. 특히 missing information은 "RWD로 당장 메울 수 있는 공백인지, 레지스트리 같은 별도 체계가 필요한 공백인지"를 가르는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2. Pharmacovigilance Plan = 연구 디자인 제안서
루틴한 감시도 있겠지만, RWE를 분석하는 입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추가적인 약물감시 부분입니다. 여기에 적힌 문구들은 곧바로 역학적 연구 설계로 치환됩니다.
- "장기 안전성을 확인하겠다" -> 코호트 연구 설계 필요
- "희귀한 이상반응의 연관성을 규명하겠다" -> 환자-대조군 연구 또는 SCCS 설계 필요
다만 실제로 설계를 제안하려면, 어떤 디자인이 원론적으로 맞는가뿐 아니라 데이터가 그 질문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사건 정의 가능성, 표본수, 추적 가능성 등이 모두 현실성 판단의 일부입니다.
결국 PV Plan은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적은 문서이고, 분석가는 그에 맞는 도구를 매칭하고 현실성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Risk Minimisation Plan = 중재 효과 분석
특정 위험을 줄이기 위해 조치를 한다고 하면, 분석가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조치가 진짜 효과가 있었을까?"
이 질문은 데이터 분석에서 정책 효과 평가의 영역입니다.
- 경고 문구 배포 시점을 기준으로 전후의 처방 패턴이 꺾였는가?
- 특정 검사 모니터링 이행률은 올라갔는가?
- 가능하다면 이상사례 발생 자체의 추세가 바뀌었는가?
여기서 단순 전후 비교는 동시기의 다른 변화 때문에 착시가 생길 수 있어, 상황에 따라 시계열이나 비교군을 둔 설계를 고민하게 됩니다.
4. 마무리: 통역사의 역할
RMP는 PV 전문가가 작성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을 해결하려면 데이터 전문가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PV팀은 "무엇이 걱정되는지"를 정의하고, 분석가는 "데이터로 그 걱정을 어떻게 검증할지"를 설계합니다. 제가 굳이 타 부서에서 작성하는 RMP를 공부하는 이유는, 이 질문과 대답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